<원시문화> 읽기: 2장 문화의 발달 원시문화

이 장에서 타일러는 근대 서구 사회를 문화 발달의 최고점에 두고서, 야만에서 문명으로 진화해가는 인류 문화 발달의 기본 이론을 전개한다. 어떻게 보면 이 장은 근대 서구의 시선으로 인류 문화의 다양성을 조망하는 가운데, 19세기 후반이라는 시대적 한계를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장이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


옛날이 좋았지. 우리는 가끔 오늘날의 부패와 타락을 한탄하면서 막연히 과거를 그리워한다. 마치 예전에는 좋은 일만 있었다는 듯이, 선택적인 기억을 통해 지난날을 미화하며 과거를 호출한다. ‘십 년, 이십 년 전에는 말이야...’


때로 우리는 아득한 옛날에는 (타락한 오늘날과 달리) 더욱 순수하고 고상한 사람들이 살았고, 심지어 오늘날보다 더 높은 수준의 문명을 누리며 살았을 것이라고 상상해보곤 한다. 사실 아득한 고대에 이상향을 설정해두고 경험하지 못한 과거를 그리워하는 경향은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한계와 타락상을 심각하게 느끼면서 대안적인 문화를 갈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되풀이해서 등장하는 경향이기도 하다. 


타일러는 이러한 경향을 빗대어 말한다.


“파시교도는 사람도 소도 죽지 않았고 물과 나무도 결코 마르지 않았으며 식량이 무궁무진했고 추위도 더위도 없었고 질투도 늙음도 없던 이마왕이 통치하던 행복한 시절을 그리워한다. 불교도는 지면에 형성된 맛있는 거품을 맛보고 악에 물든 뒤 차례차례 타락해서 쌀을 먹고 아이를 낳고 집을 짓고 재산을 나누고 카스트를 수립하게 된 불행한 시대가 도래하기 이전의, 죄도 성별도 없었고 음식도 필요로 하지 않았던 찬란하게 우뚝 솟은 존재들의 시대를 그리워한다.” 

“언제나 뒤돌아서 고대인의 지혜를 더듬어 보는 사람들, 흔한 생각의 혼란으로 인해 노인의 지혜를 옛날 사람들의 것으로 돌리는 사람들, 한때 찬미되었지만 지금은 눈앞에서 새로운 체계들로 대체되고 있는 생활 방식을 굳게 고수하는 사람들은 현재의 퇴보와 관련해서 먼 옛날 원시적 영광의 시대를 회고하는 경향이 있다.”

 

타락한 현대인 vs. 고상한 ‘야만인’


타일러는 지식과 기술적인 측면에서, 나아가 도덕과 정치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른바 야만인 사회가 문화의 세부 항목에서 탁월함을 나타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인정한다.  

가령 타일러가 근대 문명인의 모델로 상정한 표준적인 영국인은 “자신이 조야한 오스트레일리아인처럼 나무에 올라가지 못하고, 브라질 숲의 야만인처럼 사냥감을 뒤쫓지도 못하며, 고대 에트루리아인이나 현대 중국인과 금세공 작업 및 상아조각의 섬세함을 겨룰 수도 없고, 고대 그리스 수준의 웅변술이나 조각술에도 도달하지 못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의 대도시들에서 소위 ‘위험한 부류들’은 끔찍한 비참함과 타락에 빠져 있다. 만약 우리가 뉴칼레도니아의 파푸아인들과 유럽의 거지와 도둑 무리를 나란히 놓고 비교해야 한다면, 우리들 한복판에 야만성보다 더 나쁜 무언가가 있다는 점을 애석하게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덧붙여, 타일러가 볼 때 우리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의무와 거룩함과 사랑의 종교”로 마음을 가득 채운다고 하면서, 정작 지성적 생활에서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과거가 기술적으로나 지성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오늘날의 우리보다 더 고상하고 더 탁월한 것처럼 보이는 강력한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문화의 발달을 주장하는 타일러는 어떻게 이 난관을 뚫고 설명을 이어갈까? 해결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러한 사례들을 일종의 예외적 상태로 여기는 것이다. 지성적, 도덕적, 정치적 생활은 폭넓은 관점에서는 진보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동일한 보폭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일종의 지체 혹은 역전 현상이 곳곳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류 역사 전체를 조망할 때, 진보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물결이라는 것이다. 문명의 억지와 쇠퇴는 발달의 큰 흐름 속에 나타나는 국지적 현상에 불과하다.


“북미 인디언의 환대, 상냥함, 용기, 깊은 종교적 감정을 묘사한 글을 읽을 때, 우리는 진심으로 감탄하면서 그러한 주장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글자 그대로 지나칠 정도로 환대한다는 것과, 그들의 친절은 화가 솟구치면 광포함으로 변한다는 것, 그들의 용기는 잔혹하고 기만적인 악의로 물든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종교는 어리석은 믿음과 쓸데없는 예식으로 표현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퇴보 이론


고상한 야만, 이상적 원시를 그리워하는 경향은 단지 대중의 막연한 관념 속에서 나타났을뿐 아니라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론화되어 왔다. 최초의 인류가 고등한 문화를 향유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퇴보해왔다는 19세기 초 조제프 드 메스트르 백작의 퇴보 이론이 그 사례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원상태는 거의 고등문화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이론들은 대중적 견해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쳐 왔다. 그렇지만 타일러가 볼 때, 그러한 퇴보 이론들은 민족지적 근거를 결여하고 있으며, 흔히 신학적 사색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가령, 고등 문화를 본래적인 것으로 보고, 후대의 야만 상태는 고등 문화로부터 퇴보한 것이라고 보는 가설은 (신이든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외계인이든) 초자연적 개입을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다. 신적인 개입으로 고상하고 탁월한 원문명이 인간에게 수여되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타일러는 그러한 신학적 주장을 강력히 거부한다.

“초기 문명의 문제를 연구할 때, 계시를 토대로 과학적 견해를 좌초시키려는 주장은 본질적으로 불쾌한 것이다. 만약 연구자들이 천문학과 지질학에서 과학의 근거를 종교에 두려는 시도가 낳은 불행한 결과를 목격하고서도 민족학에서 비슷한 시도가 일어나는 것을 묵인한다면, 이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선사 고고학의 증거


타일러는 인간의 태곳적 조건을 탐구하기 위한 해결의 열쇠는 신학이 아니라 선사 고고학이 쥐고 있다고 강조한다. 물론 이스터섬의 엄청난 크기의 인간 석상들처럼 미해결의 문제도 남아 있지만, 대체로 지구 곳곳에서 발견되는 자갈 더미, 동굴, 조개껍데기 더미, 고대의 유물들을 살펴볼 때, 문화 발달에 관한 증거의 설득력이 압도적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내가 어느 한도 내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입증하려는 논지를 간단히 말하자면, 야만 상태는 대체로 인류의 초기 조건을 대표하는데, 거기서부터 고등 문화가 점차 발달 혹은 진화해왔고, 그 과정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아직까지도 규칙적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그 결과는 대체로 진보가 퇴보보다 우세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타일러가 문화의 발달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전쟁 도구, 무기, 전쟁 기술의 발달을 검토하는 부분은 흥미롭다. 무기의 선택과 정교화 과정은 “눈먼 본능”이 아니라 “자연이 펼쳐 놓은 물체와 작용의 선택과 모방, 점진적 적응과 개선”의 과정을 보여준다. 인류는 원시시대부터 자연의 선택, 모방, 적응, 개선을 통해 기술의 초기 발달을 이루어왔다. 음악이나 농경, 방직 기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타일러는, 야만 상태로부터 현대의 교양 있는 우리 자신에게로 기술과 지식이 진보되어온 것이 인류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문명이란 인간의 선함, 힘, 행복이 한꺼번에 증진될 때까지 개인과 사회가 더 높은 수준으로 조직화됨으로써 이루어지는 인류의 일반적 향상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러한 이론적인 문명은, 야만과 미개, 미개와 현대의 교양 있는 생활과의 비교를 통해 추정되듯이, 실제의 문명과 상당히 일치한다....세계의 물리적 법칙에 대한 지식이나 자연을 인간 자신의 목적을 위해 개조하는 힘의 수반은 전체적으로 야만인에게서 가장 낮게, 미개인들에게서 초라하게, 현대의 교양 있는 민족들에게서 가장 높게 나타난다.”  


문명, 그녀는 앞으로 나아간다.


타일러는 이 장의 말미에서, 문화의 일반적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탈이나 퇴행,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행되는 진보의 물결을 "신화적 말투"로 제시한다. 문명이란 가장 인간적인 것이고, 인간적인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본질로 삼는다.

“우리는 문명이 세계를 가로지르는 인격적 인물인양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녀가 도중에 지체하거나 쉬는 것을, 그리고 종종 길을 벗어나서 오래전에 지나왔던 곳으로 고생스럽게 돌아가게 하는 길로 접어드는 것을 목격한다. 그렇지만 바로 가든 둘러 가든 그녀의 길은 앞을 향해 나있으며, 만약 그녀가 몇 보를 뒷걸음질하려고 시도한다면, 그녀의 걸음은 곧 속수무책으로 휘청거리게 된다. 이는 그녀의 본성에 따른 행동이 아니며, 그녀의 발은 자기 뒤로 불확실한 걸음을 떼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앞을 향한 시야와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걸이 모두에서 그녀는 진정 인간적인 유형에 속하기 때문이다.” 


덧) 이 장과 관련해서, 2002년에 썼던 글을 참고로 링크해둔다. 


덧글

  • 2019/02/11 09:1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9/02/11 10:0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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