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름신의 강림 기타

12년 전에 한국 인터넷 문화에 관해 썼던 글 가운데 지름신에 관련된 부분의 한글 초고를 일부만 옮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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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연결되어서, 우리는 우리가 결코 상상해본 적이 없는 장소들에서 신을 발견하기 시작할 것이다."
(Joshua Cooper Ramo, "Finding God on the Web", Richard Holeton ed., Composing Cyberspace: Identity, Community, and Knowledge in the Electronic Age)


그렇다! 사이버공간에서 한국인들은 ‘결코 상상해본 적이 없는 장소들에서’, 인터넷 쇼핑몰에서 새로운 신을 발견하였다. 아니, 쇼핑몰 뿐 아니라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컨대 자주 방문하는 블로그 이웃의 공간에서 새로운 신이 강림하는 것을 경험하였다. 사이버공간에서 그 어떤 신보다 부드럽고 강력하게 임재하는 그 신에게 사람들은 ‘지름신’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었다. ‘지름신’이라는 신조어는 사이버공간에서 이제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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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신이라는 용어가 한국인들에게 순식간에 퍼져나가고 일상적으로 사용되게 된 점은, 많은 한국인들이 사이버공간에서 스스로 제어하기 어려운 충동적인 소비욕망을 공통적으로 경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진보보수 가릴 것 없이, 사이버공간에서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강렬한 소비 충동을 느끼게 되며, 한국의 네티즌들은 ‘지름신이 강림하셨다’는 말로, 자신의 과소비, 충동구매를 ‘신의 강림’에 의한 어쩔 수 없는 현상으로 합리화/희화화하고 있는 것이다.


(유기쁨, <위험한 현실 너머의 구원을 찾아서 : 한국 인터넷 문화의 종교적 현상>, "Looking for Salvation beyond a Risk-laden Reality: The Religious Nature of Korean Internet Culture", Korea Journal, 2007)

(사진은 한 블로거가 만화 《지상 최강의 남자 류(地上最強の男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편집해 만들어 올린 지름신의 이미지이다. <<위키백과사전>>의 <지름신> 항목(2006년 10월 15일 편집) 참조)


사이버 의례

2007년에 발표한 글에서, '사이버 의례'와 관련된 한글 초고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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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공간 신화의 배경이자 그러한 신화를 개인에게 전파하고 강화하는 것은 바로 사이버공간의 의례를 통해서다. 사이버공간에서 의례가 형성되는 현상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생각될 수 있다. 첫째는 반복적인 접속 자체에서 나타나는 물리적 신체를 통한 의례화의 차원이며, 둘째는 사이버공간 내부에서 주기적 반복과 형식화된 방문을 통해 나타나는 의례화의 차원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차원의 사이버 의례는 실제로는 분리될 수 없이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의례이며, 후자는 전자의 자발적이고 반복적인 신체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선, 반복적인 접속에서 나타나는 의례화의 차원을 살펴보자. 사이버공간이라고 할 때 ‘공간’의 이미지는 유기체로부터 동떨어져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실재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실제로 사이버공간은 모니터 앞에 앉아있는 물리적 신체, 그리고 물리적 현실과 상호 연관되어있으며, 후자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비독립적 공간이다. 흔히 사이버공간은 신체가 배제된 소위 ‘정신’만의 공간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사이버공간은 모니터 앞 신체를 전제로 하고 성립되는 공간이며, 몸의 부단히 반복적인, 그리고 형식화된 고정적 행위를 통해서 펼쳐지게 되는 공간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이버공간의 근거이자 한계이다. 결국 사이버공간의 초월은 현실세계를 완전히 대신하거나 벗어나는 초월이 아니며, ‘되돌아옴으로써 가능해지는 초월’인 것이다. 


오늘날 사이버공간이 한국인에게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사이버공간으로의 습관적인 접속, 모니터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눈과 키보드를 두드리고 마우스를 움직이는 손의 대단히 정형화된 움직임이 대다수 한국인에게 일상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말이다. 컴퓨터 앞에서 접속하는 행위 자체가 의례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언가를 의례화하면, 그 대상은 의례화 과정에서 모종의 힘(power)을 획득하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사이버공간은 한국인들의 의례화된 (접속)행위를 통해서 자체의 매혹적 지속력(생명력)을 유지, 증식시키고 있다. 의례화된 행동은 새로운 환경을 창출하고, 새로운 환경은 다시금 의례화된 인간을 탄생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되먹임의 작용은 계속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사이버공간으로의 접속 의례가 전제로 하는 신체의 희생이다. 탈육체의 환상이 우리를 매료시키고 있지만, 모니터 안의 깔끔하고 멋진 (재현된) 이미지들과는 달리, 모니터 앞의 ‘나’는 몇 시간째의 인터넷 항해로 건조해진 빨간 눈과 벌린 입을 가지고 두통과 견비통을 느끼고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신체의 고통은 무시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신체의 희생은 사이버공간으로의 접속을 위해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한국에서 사이버공간이 놀랄만한 속도로 확장되고 있지만, 그 이면에서 많은 한국인들은 동일한 형식의 신체 활동과 그에 따른 신체적 불편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유기쁨, <위험한 현실 너머의 구원을 찾아서 : 한국 인터넷 문화의 종교적 현상>, "Looking for Salvation beyond a Risk-laden Reality: The Religious Nature of Korean Internet Culture", Korea Journal, 2007)


메모: 전통생태지식 분석을 위한 틀구조 (Sacred Ecology) 생태학

결국 <성스러운 생태학> 4판(Fikret Berkes, Sacred Ecology, New York: Routledge, 2018)을 구입해서 읽고 있다. 잘 산 것 같다. 내가 원래 갖고 있던 2판보다 많은 부분이 보완된 것 같다. 일부만 거칠게 메모해 둔다.

1. 배경
저자인 Fikret Berkes는 원래 해양과학자였다. 그러나 박사학위 취득 후에 과학철학을 접하게 되고, 여차저차 멋진 포닥 자리를 포기하고서 인류학자와 함께 크리족의 어로 활동 연구에 참여하게 되었다(1974년부터). 그리고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수확을 얻게 되었다. 크리족이 가진 조류, 바다, 물고기 등에 대한 지식에 놀라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공유지의 비극 등을 비껴 가는 그들의 전통적인, 공동체 기반의 자원 관리 방식에서 깊은 인상을 받게 되었다.


이어지는 내용

종교를 종교로 정의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종교학

종교와 신화는 어떻게 다른가?
종교를 종교로 정의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1.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 말하자면, 신화는 ‘이야기’입니다. 글자대로 풀어서 신화를 ‘신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하지만, 저는 로버트 시걸이 말하듯이, 신화를 ‘어떤 중요한 것에 관한 이야기’ 정도로 폭넓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이에 비해 종교는 보통 –이야기뿐 아니라- 이야기를 포함해서 더 넓은 범위까지 포괄하는 단어로 흔히 사용됩니다. 종교라고 하면, 우리는 신이나 어떤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 숭배 의례, 신도들이 모인 조직, 성직자... 등을 떠올리기 십상입니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따지면서 얘기해보면, 저마다 그리는 ‘종교’라는 것이 서로 똑같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물을 수 있습니다. 일반적 의미에서 ‘종교’라는 것은 무엇일까? 과연 ‘무엇이 종교를 종교라고 정의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일까?’ 그런데 여기서 대답은 명쾌하지 않습니다. 간단히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요. 왜냐하면 종교라는 단어로 지시될 수 있는 어떤 고유한 영역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내용

생태학적 시선으로 만나는 종교 - 닫는 말 생태학적 시선으로 만나는 종교

우리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문화에 대해서 낭만적인 동경을 품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종교문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구 사회에서는 환경오염을 비롯한 생태 문제가 심화되면서, 근대 서구문명이 낳은 생태계 위기 문제를 극복할 힘을 ‘동양’의 ‘고상한 종교들’이 가지고 있으리라 기대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멀리 떨어져있는 “고상한 타자(noble Other)”들의 종교문화에 대한 막연한 환상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모든 종교 전통은 변화하는 사회문화적 환경, 나아가 생태적 환경 속에서 적응하면서 흘러가는 역동적 과정 속에 있으며, 여기에는 온갖 다채로운 목소리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코 변하지 않는 견고한 실체로서의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우리는 불교, 그리스도교, 힌두교 등의 명칭으로 편의상 뭉뚱그려지는 종교 전통들이 결코 일관된 구성물이 아니라 종종 모순들로 가득 차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모호함이 있기에, 어떠한 맥락에서 어떠한 시각으로 접근할 것인지, 주체들의 선택이 중요하게 대두되는 것이지요. 

이 책은 오늘날 다각도에서 생태환경 문제를 경험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가 생태학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여러 종교전통을 만나면서 풀어놓는 –여러 가지 가능성 가운데 하나의- 이야기였습니다. 지금까지 생태학적 시선으로 종교를 만나는 모험을 감행했지만, 어쩌면 종교들이 –오늘날의 생태계 위기 문제에 대해- 주는 ‘대답’이 아니라, 종교들이 새삼 일깨우는 ‘물음’을 통해 일상을, 세계를 다시 상상할 수 있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쉬운 해답보다 좋은 물음을 만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길게 보면 삶 속에서는 쉬운 해답보다 좋은 물음을 만나기가 더 어려운데, 그것이야말로 더 중요하며 더 오랫동안 깊이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말쑥하진 않더라도, 물음을 통해 촉발된 자유로운 상상이 열어놓은 문제의식은 손쉬운 해답보다 훨씬 오래 남으며, 새로운 생각과 성찰의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그러하지만, 진정한 만남은 만남의 주체들을 변화시킨다고 합니다. 오늘날 생태계 위기 상황에서 생태학적 시선으로 종교문화들과의 만남을 시도한 이 책은 종교와 생태의 수많은 만남의 가능성들 가운데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합니다. 바라건대, 이 한 가지 사례가 작은 노래가 되어 여러 사람들에게 또 다른 그들만의 노래들을 이끌어내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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